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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개성인삼

작성자 금산인삼도매센터 영농조합(ip:)

작성일 2012-07-19

조회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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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개성은 인삼 농사와 상업 자본이 결합된 한국 인삼 산업의 메카였다.

개성이 인삼의 대명사가 된 것은 인삼 재배에 적합한 천혜의 조건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자금이 들어가는

인삼농사에 개성상인의 자본력이 결합되어 꽃을 피운데 따른 것이다.

 

6.25동란 때 남쪽으로 피난온 개성인삼 농민들이 휴전선에 말혀 돌아갈 수없게 되자 '개성의 인삼종자"를 구하기

위해 유격대원처럼 야밤에 강화도에서 배를 타고 개성으로 잠입해 목숨을 걸고 종자를 구해온 사건은 개성사람들의

개성인삼에 대한 자부심을 파악할 수있는 실례이다.

 

개성은 고려왕조 500년간 수도로서 그들의 자존심은 대단했다.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가 하루 아침에 멸망하고 이성계가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자 개성사람들의 반감은 더욱 깊어졌다.

개성 사람들은 조선시대에 관직에 나가지 않는 것을 고려왕조에 대한 지조를 지키는 것으로 여기고 대신 타고난 금면성

으로 상업에 몰두했다.

 

개성상인들은 축척된 자본을 인삼 재배와 가공업에 투자했다. 이에따라 개성지방에는 인삼밭이 급격히 늘어났고, 홍삼

제조업도 발달하게 되었다. 당시 개성상인이 인삼 재배에 자본을 적극 투자한 것은 인삼농사의 높은 수익성 때문이었다.'

19세기 중반 한 개성상인의 외상장부에 따르면 삼포에 투자하고 받은 이익 배당금이 1844년 1,661냥 1850년 2,200냥이었다.

1823년 당시 전라도 해남지역의 논 세마지기가 42냥이었고 1885년의  경우 8.5냥이었음에 비추어 볼때 엄청난 배당이었다.

인삼 농사가 6년 이상 자본이 묶이고 위험도가 높지만 기업가 정신이 충만했던 개성상인에게는 젛은 투자처였던 것이다.

 

한편 이들은 인삼 장사로 모은 돈을 사회에 환원하는 일도 소홀이 하지 않았다.

개성인삼 상인들이 인삼에서 얻은 막대한 부를 독립군 군자금 지원과 교육사업 그리고 장학금에 쓴일은 유명하다.

개성을 무대로 한 소설 [미망]에 주인공이 삼농사를 지어 모든 돈을 독립자금으로 보내는 이야기는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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