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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속 대표 교역품ㅡ 인삼(백제,고구려)

작성자 도우미(ip:)

작성일 2012-08-07

조회 1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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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유럽인들이 아프리카를 돌아 아시아로 오고자 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후추를 얻기 위함이였다고 합니다.


후추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형료, 중국의 비단, 도자기, 차 등은 세계사를 변화시킨 아시아의 특산품이자


수출품이었다. 한국사에서 이와같은 수출품을 찾는다면 단연코 인삼이라 할 수 있다.


 


인삼에 관한 최초의 기록


 


인삼에 대한 최초의 기록들은 중국 쪽 문헌자료에 등장한다. 진한의 원재 (B.C48~33)때 사유가 지은 문자교본인


[급취편]1,900자 가운데 '삼(蔘)'글자가 등장한 것으로 볼때, 약 2천년 이전부터 인삼이 새상에 알려졌다고 할


수 있다. 후한 헌제의 건안(196~220)연산에 장중경이 저술한 의서[상한론]에서는 처음으로 인삼을 이용한 21개


처방법이 등장한다. 이것으로 보아 인삼이 약재로 이미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백제와 고구려의 인삼


 


도홍경(456~536년)이 쓴 [본초경집주]에는 인삼의 생산지 품질을 비롯하여 그 약효와 사용법 등 인삼에 관한


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이 책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등장한다.


 


"인삼은 백제의 것을 중요시하는에, 모양은 가늘지만 단단하고 희며 기운과 맛은 상당(上黨)삼보다 부드럽다.


 다음으로는 고구려삼을 사용하는데 고구려는 바로 요동이다. 모양은 크지만 속은 성글고 연하여 백제의


 것보다 못하다. 백제가 요사이 사신을 고구려에 따려 보내어 인삼을 가져오는 것이 (백제삼과 고구려삼)


두가지 이다. 오로지 사용처에 맞추어 골라 사용할 뿐이다. 실제로 사용해 보면 상당삼보다 못하다."


 


여기에 등장하는 상당(上黨)은 중국 산서성 지역이다. 그런데 상당삼은 이미 당나라 시대에 멸종되었고


초롱꽃과에 속하는 만삼(蔓蔘)이며 도라지와 비슷한 것으로 인삼이 아니라고도 한다.


5~6세기 중국에서 널리 소비된 것은 백제 인삼과 고구려 인삼이었다.  537년에 양나라 숙자현이 쓴[남제사]


'고려전'에는 "고구려에서는 은산에서 은을 채취하여 재화로 삼았고 , 인삼과 담비 가죽 또한 그러하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기록에 특별히 인삼 ,담비가죽, 은 등이 소개된 것은 중국인들이 고구려에서 수입하고자


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인삼을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양나라에 대한 인삼 교역권을 빼앗기도 했을 만큼


교역의 이익이 컸던 물건이었다


 


7세기에 쓰인 [한원]에는 "고려기(高麗記)에는 마다산은 나라 북쪽에 있다. 고려(고구려)의 중앙이다.


이 산이 가장 크다. 거기에는 인삼등이 많다. "라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 인삼의 생산지까지도 중국인의 관심 대상이었던 것이다. 관정이 쓴[국청백록]에는 "고구려 영양왕이


인삼을 수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7세기 초 고구려는 유성(현 요령성 조양시)지역에 한번에 2만 명의


돌궐 상인단을 맞이 할 수 있는 거대한 국제시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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