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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 속 대표 교역품(신라,고려이후)

작성자 도우미(ip:)

작성일 2012-08-08

조회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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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신라의 인삼 수출

백제와 고구려만 인삼을 수출한 것은 아니다 신라 역시 인삼 수출에 나섰는데, 734년의 경우 당나라에 한번에

200근 이상을 수출하기도 했다. 신라에서는 1척 남짓한 인삼을 삼나무를 양편에 대고 붉은 비단으로 싸서  수출했다

신라출신으로 당나라에서 관리생활을 했던 최치원(857~?)은 자신의 상관에게 인삼을 따로 챙겨 줄만큼 인삼은 신라를

대표하는 상품으로 당나라에 알려졌고 당나라의 소비층 또한 많았던 것이다.

 

신라는 인삼을 일본에도 수출했다. 신라뿐만 아니라, 발헤의 경우도 739년에는 문왕이 일본에 인삼 30근을 보내기도 했다.

백제와 고구려 인삼의 평가처럼, 신라 인삼은 발해 인삼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인삼은 토질에 따라 그 품질이 달라진다.

일본에서는 에도시대(1603~1867)에 인삼 수요가 크게 늘어났다. 1728년 일본에서 인삼 재배에 성공하기도 했으나 품질이

좋지 못해 결국 조선에서 인삼을 계속 수입할 수 밖에 없었다.

 

고려인삼

 

고려는 송나라 등과 활발한 무역을 했는데 고려시대에 한번 시신이 방문할 때 가져간 인삼은 1,000근이나 되었다.

송나라뿐 아니라 아라바아,동남아 여러 나라와도 활발한 요역이 이루어졌으며 원나라 황재들도 고려의 인삼을

대단히 좋아했다.

 

고려시대에는 인삼을 장기간 보전할 수있는 홍삼 제조기술이 등장했다. 1123년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는 고려인삼에 관해 "여름을 지나면 좀이 먹으므로 쪄서 익혀 오랴 둘 수 있는 것만 같지 못하다"

고 하여 인삼을 쪄서 만든 홍삼 제조 기술이 이미 개발 되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2012년2월 천성산 관음사 목조보살좌상(1502년 만들어진 조선의 불상)의 복장유물에서 약 1,000여년 전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홍삼이 발견된바 있다. 복장유물이라 함은 불상을 만들 때 불상 안에 넣는 불경,고예품 ,각종 보석류와

같은 문화재를 일컫는 말인데 오래된 홍삼이 귀한 것이다 보니 부처님께 공양하기 위해 불상 안에 넣어진 것이다.

 

인삼의 대량 재배

 

인삼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 더욱 중요한 수출품이 되었다. 명나라는 조선에게 인삼을 조공품으로 바치라고 요구했다.

명나라 말부터 중국인들의 인삼 수요는 더욱 켜져갔다. 조선은 사신단의 비용을 중국에 가서 인삼을 판것으로 충당

 

고려 시대까지 인삼은 산삼이어서 생산량에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조선 초기부터 서서히 인삼의 인공재배가 시작

되었다. 특히 1724년 개경 사람 박유철 등이 해를 가르는 방법으로 인삼 농사법을 개발해 인삼을 대량으로 재배하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서유구(1764~1845)가 쓴 [임원십육지]에 제주도를 제외한 전 국토에서 인삼이 분포한다.고

핳 절도로 인삼재배는 빠르게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청나라에 대한 인삼 수출은 계속해서 늘어나 1851년에는

4만근까지 늘어났다  인삼이 아편에 찌든 사람들에게 특효라는 소식에 인삼 소비가 빠르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의주상인 임상옥은 1821년 사신단을 따라 청나라에 갔을 때 베이징 상인들의 불매 동맹을 교묘한 방법으로

깨뜨리고 원가의 수십배로 인삼을 매각하는 등 막대한 재화를 벌기도 했다. 인삼 무역이 확대됨에 따라 조선의

재정에서 인삼을 통해 얻는 수익의 비중은 커져만 갔다.

점차적으로 조선은 인삼을 매개로 일본의 은과 중국의 비단 교역을 키워갔다.

인삼이 일본과 중국을 잇는 동아시아 삼국교역에서 핵심물품의 위치를 차지했던 것이다.

 

서양에도 알려진 인삼

 

16세기부터 아시아로 진출하기 시작하던 서양인들도 조선 인삼의 가치에 대해 적잖게 파악하고 있었다.

'Ginseng’ 이란 말은 1762년 프랑수아즈에 의해 공인된 말로 당시 프랑스에서는 고려인삼에 대해 백과전서

한 폐이지를 할애해 논할 정도였다. 이와같이 서양인들은 중국에서 조선 인삼의 인기가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이와 유사한 종을 조선 밖에서 찾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적은 자신들의 소비가 아닌 동아시아 시장에

팔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1715년 프랑스의 라피노 신부가 캐나다 퀘벡 지역에서 인삼과 유사한 종을 찾아낸다.

네덜란드 상인들을 중심으로 다량의 인삼이 애팔래치아 산맥에서 채집되고 중국으로 수출되었다.

월등히 싼 아메리카 인삼은 대중들이 건강식품처럼 구입했다.

아메리카 인삼 텃에 조선은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수출물량을 제한 하기도 했다

조선 홍삼의 1/5가격의 아메리카 인삼은 1862년에는 무려48만근이나 수출되었다.

이것이 결국 조선의 인삼의 독보적인 위치를 흔들어 놓았다. 지금도 세계 시장에서는 외국산 인삼들이

값싸다는 이유로 많이 팔리고 있지만 약효만큼은 절대로 우리나라 인삼을 따라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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